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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방학에 발리에서 탐방을 한 학우들의 외부기고입니다*

 

“발리에선 누구나 사랑에 빠지잖아.” 

– 영화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中-

0.

발리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발리’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주인공 리즈 길버트(줄리아 로버트).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였던 그녀는 삶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부터 극심한 정신적 허기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사는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는 것. 일종의 허무증세랄까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선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고 발리. 이탈리아에서는 ‘먹고’, 인도에서는 ‘기도’하며, 발리에서는 ‘사랑’을 합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우리에게 발리가 ‘낭만적 사랑’의 대명사와 같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발리에선 누구나 사랑에 빠지잖아.” 극중 대사입니다. 길버트가 사랑을 찾는 곳 역시 발리지요. 왠지 발리에서라면 사랑이 완성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드러나는 발리의 모습이 우리가 ‘발리’라는 말을 들을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의 일면을 전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신혼여행지로 발리를 찾는 것 역시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지뿐만이 아닙니다. 실제 발리는 높은 파도의 바다와 황금빛 해변, 길가에 늘어선 야자수와 호화로운 리조트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프랑스식 코스요리와 밀라노를 연상시키는 패션 상점들이 대변하듯이, 외국자본에 개방적인 소비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신혼여행지로서 완벽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발리인들 스스로도 이러한 위치에 제법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젊은 외국인 부부들이 외화를 꾸준히 공급해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리를 두고 사랑의 섬이라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낙원이라 부르는 발리, 실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은 어떤 무늬를 띠고 있을까요. 그들의 결혼생활의 질감은 어떠할까요. 호텔로 가득한 섬 바깥쪽이 아닌, 집집마다 힌두식 석조 사원을 조성해 둔 섬 안쪽 사람들의 삶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리 사회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의 열쇠가 되어줄 수 있는 말이 바로 ‘카스트 제도’입니다.

 

 

힌두 사회로서 발리의 면모는 이만여 개에 달하는 힌두사원, 자식의 이름을 짓는 방식과 장례 문화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가장 생활에 밀착한 형태로는 카스트 제도가 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 인도네시아어과 이연 교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발리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하셨거니와, 카스트 제도가 남성과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 논쟁거리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는 혼인에 따른 카스트의 변동이 있습니다. 다른 카스트 사이에 혼인을 할 시, 여성의 카스트는 남성의 카스트에 종속됩니다. 예컨대 크샤트리아 남성과 카스트를 지니지 않은 여성이 혼인할 때, 여성의 카스트가 크샤트리아로 승격되는 식입니다. 모든 이가 다른 카스트 출신의 상대방과 혼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 카스트 사이의 혼인 문제를 빼놓고서는 발리사람들의 사랑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희는 발리에서 일주일 간 체류하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발리의 성차별적인 전통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을 쓴 작가, 자신보다 높은 카스트의 아내를 맞아들인 남편, 자신보다 높은 카스트의 남편과 혼인한 아내와 그 시아버지, 카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의 주민들과 택시 기사들의 의견까지. 어떤 이야기들은 이어졌고, 어떤 이야기들은 서로 상충되었습니다. 지역별로 관습, 전통에 차이가 있는 만큼 잠시간의 만남들로 전체적인 그림을 잡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만난 몇몇 사람에 대해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1.

 

“모두 실제 케이스에 기반한 이야기들입니다아마 한국에서도 상황은 같을 것이라 생각해요.”

 

작가 오까 루스미니(Oka Rusmini). 소설 ‘발리의 춤(Tarian Bumi)’의 작가입니다. 2000년도에 출간된 ‘발리의 춤’은 집요한 스토리텔링으로 수드라 여성 ‘뜰라가’와 브라만 여성 ‘스까르’가 자신과 다른 카스트의 남성을 만나 혼인함으로써 겪는 고통과 희열을 다룹니다. 그 과정에서 발리 사회의 카스트 제도와 성차별적인 관습은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발리사람들의 사랑에 있어,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측면에 주목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발리의 춤’을 집필하게 했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고발한 발리 사회의 폐쇄적인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작품이 집필된 2000년으로부터 현재까지는 19년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발리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런 물음들에 대한 작가님의 의견이 발리사람들의 혼인과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Q. 발리의 춤을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발리의 춤에 나오는 여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몸 역시 객체로서 그림에 묘사되거나, 춤을 추는 데 쓰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좁습니다.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에게도 대항하지를 못합니다. 모두 실제 케이스에 기반한 이야기들입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상황은 같을 것이라 생각해요. 인터뷰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만난 많은 작가들은 한국에서도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가 균등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견디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요. 문제상황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에서 삼 개월 체류할 때는 독일 여성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들 역시 같은 문제에 처해있었지요. 독일의 한 가정에서 머물렀는데 그 남편 역시 책임을 팽개치고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젠더 이슈는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저를 두고 남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저 자신부터 두 명의 남성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웃음) 남편과 아이가 있지요.

 

그러니까 실제 케이스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소설 집필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작가님은 발리사람들의 사랑에 있어서 폭력적인 지점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문제를 발리 내부만의 것으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라고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어디까지나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라는 것. 다른 카스트 간 혼인은 한 사례일 뿐, 그것을 문제의 최종적인 원인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Q. 집필 당시와 지금 사이에 발리는 어떻게 변했나요

 

‘발리의 춤1970년대를 상정하고 쓴 소설이에요. 당시만 해도 카스트에 대한 집념이 굉장했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50년 정도가 흐른 셈이죠. 사람들은 발리를 국제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만 묘사하곤 했어요. 많은 관광객이 찾고, 문제가 없는 그런 장소로요. 저는 발리의 춤을 써서 발리가 그처럼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고 했어요. 문제는 그때도 있고 지금도 있지요.

 

 

작가님은 발리의 춤의 영화화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발리의 춤이 영화화된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러나 저는 확신이 안 들어요. 책 속엔 관객들이 불편해할 장면들이 여럿 있지요. 예를 들자면, 여성이 헐벗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런 장면이오. 그런 장면들을 모두 포함한 채 영화화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발리의 춤이 영화화된다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를 원해요.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을 아우르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될 만한 그런 내용의 다큐멘터리요. 거기에다 에로티시즘, 동성애 등등의 요소까지 담아낸다면 더 좋겠지요.

 

마지막 답변이 오까 루스미니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전달한다고 느꼈습니다. ‘있는 것들’을 정직하게 쓰고 그롤 통해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어쩌면 이 윤리관이 소설 ‘발리의 춤’을 밀고나간 가장 큰 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님이 사랑의 폭력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2.

 

반면 발리사람들의 사랑, 그리고 다른 카스트 간의 혼인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저희가 만난 와얀(Wayan) 씨입니다. 와얀 씨는 현재 기안야르에 소재하는 주유소에서 회계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분은 아내와의 연애에서 혼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만담을 통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건 좋아하느냐 아니냐예요. 카스트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저와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마을에 살았고, 다른 카스트에 있어서 아내의 카스트는 제 카스트를 따라 사라졌지만 문제 될 것은 없어요. 가족들의 반대도 없고, 누구도 방해하지 않아요.”

 

오까 루스미니와 와얀 씨 중간 정도의 스탠스를 취한 인터뷰이로는 제로(Jero) 씨가 있었습니다. 제로 씨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남성을 만나 카스트를 얻은 사례입니다. 그녀에게 카스트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녀는 다른 카스트의 남성을 만나 행복할까요. 자신의 딸이 다른 카스트 남성과 결혼한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저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행복해요.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카스트 집안에 들어와 살면서 어려운 점도 있었어요. 일단 말을 배우는 게 힘들었어요. 발리에는 카스트 별로 나름의 언어가 있어요. 단어가 조금씩 달라요. 카스트가 상승하면서 격식어를 배우는 것이 어려웠어요. 제 딸이 결혼한다면 중요한 건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가급적이면 가족의 평판을 유지하고 싶어요. 여자애니까 자신보다 더 높은 카스트의 남자를 만난다면 좋겠지요.”

 

3.

 

저희가 인터뷰한 사람들 대부분이 카스트가 혼인을 하고, 사랑을 하는 데에 더 이상 결정적인 제약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는 동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이 카스트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가급적이면 높은 카스트에 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높을수록 좋은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각종 계급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형태를 카스트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둘 이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니 그 안에 개입하는 것은 당사자들이 품고 있는 생각의 수만큼이나 많겠지요. 그럼에도 계급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을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그 자체로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게 만들어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양한 요소들에 밀리고 끌립니다. 카스트와 같이 단단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제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순간의 감정이나 스쳐가는 생각들에 좌우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폭 넓은 감정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안함과 충만함, 편안함과 조급함 같은 것들까지 말입니다. 발리에서 저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결론은 없습니다. 모든 사례가 그 자체로 하나의 결론이었습니다. 이 결론들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었고, 저희는 그 앞에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그저 경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지에서 탐방을 할 기회를 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Hufs to the World’ 프로그램과 현지 조사 계획 수립과 작가님 섭외에 도움을 주신 말레이 인도네시아어과 이연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마인드>가 입수한 그들의 VLOG.


이 글은 2018년 2학기부터 외대에서 처음 실시된 HUFS TO THE WORLD 팩트’책’크 문화탐방대 프로그램에 참여한 마인어과 학우 4명 조연재(14), 최태수(14), 조현화(15), 정혜원(16)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