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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맞아 마인어과에는 또 다른 따스한 시작의 바람이 불었다. 바로 <한길 장학금>의 첫 집행이 그 것.

 

누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중대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그의 원동력이, 또 그의 삶 자체가 궁금했다. 

 

수많은 궁금증을 안고 <마인드>와 한길 장학금의 첫 수혜 학생들이 한길빌딩 701호의 문을 두드렸다. 

12월의 어느 한낮, 우리는 (주)한길통상의 대표 이영우 동문(68학번)의 푸근한 미소와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서들 앉아요. 차는? 커피 괜찮은가?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에 <한길 장학금>이 처음으로 집행되었어요. 장학금 기탁이라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닌데, 선뜻 장학금을 쾌척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사실 장학사업은 스스로 했던 다짐 중에 하나예요. 사실 나름대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완벽하게 하기가 쉽지가 않죠. 언제든 자금난이 따르게 되고. 항상 완벽할 수는 없으니 그 한정된 자금이라도 가지고 일부를 좋은 일에 써야겠다, 다짐은 하고 있었어요.

 

 

혹시 “아, 이제 실행에 옮겨야겠다” 싶었던 결정적 계기가 있으신가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고영훈 교수님하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해보다가.. 또 우리 마인어과에 훌륭하신 동문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미리 장학금 많이 내시는 분들도 있고, 그 중에 1년 후배도 있고 또 몇년 후배도 있는데.. 선배 입장으로서 내가 조금이라도 시작을 하자, 라고 한 것이 <한길 장학금>이죠. 그래서 앞에 말했던 것 처럼 고 교수님하고 얘기하다가, 이게 생각이 났을 때 즉석에서 약속을 해야되겠다, 해서 내가 한다고 얘기를 했지요.

 

 

“어려운 여건 하에서 향학열이 불타는 후배들 생각을 하면,

내 학창 시절도 생각나서 더 마음이 갔네요.”

 

 

즉석에서 기탁을 약속하실 정도면, 평소에도 정말 장학 사업에 대한 고민이 깊으셨던 것 같아요.

선배님의 학창 시절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는건가요?

그렇죠. 내가 너무 어렵게 공부를 해서 그런지, 부모님이 어렵게 등록금 대주시는 학생들 마음이나 어머님의 입장을 알죠. 나도 학창 시절엔 시골에 어머니가 혼자 계시고, 또 아버지는 안 계셨고. 내가 세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 밑에서 홀로 크면서 공부도 근근히 하고, 또 자취생활도 하고. 대학교 2학년때부터는 등록금 벌어야하니까 입주해서 가정교사 생활도 했었고. 또 졸업여행도 비용 마련 때문에 못 간적이 있고. 그런 경험이 있네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덕분에 어려운 학생이나 알뜰하게 모아서 힘들게 등록금 마련하는 부모님의 입장을 잘 알아요. 특히 어려운 여건 하에서 향학열이 불타는 후배들 생각을 하면 내 학창 시절도 생각나서 더 마음이 갔네요. 그래서 적은 금액이지만 이번에 지원을 시작한 거고, 앞으로 한길 장학금을 좀 더 키워야 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요.

 

 

과거 선배님과 비슷한 사정에 놓여 있지만, <한길 장학금>의 수혜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후배들에게는 희소식이네요.

그럼 앞으로 더 크게 꿈을 꾸게 될 후배들에게 해주고픈 말씀은 있으세요?

우리 후배들이 앞으로 사회에 진출해서 선배들 이상으로 더 활동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자랑스러운 외대인이 되기 위해서 당부를 드리고싶은 사항은, “균형 잡힌 사회인”이 되어달라는 거예요.

 

 

균형 잡힌 사회인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외대인이긴 하지만 외국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소통의 도구일 따름이지 충분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물론 외국어를 전공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님의 자리에 있다, 그건 외국어가지고 충분하지만. 그런 졸업생 보다는 대부분이 사회에 나와서 일반 직장에서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마인어 전공을 살리지 않고 취업하는 동문도 많죠.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 마인어 전공을 했으니 물론 잘해야겠지만, 그 외에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국제화에 필수인 영어를 잘 해야 하고. 그리고 사회에서 많은 사람과 교류하면서, 그 자리에서 내 역할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도 할 줄 알아야해요. 경제학, 경영학, 법률, 예술, 음악, 체육,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해서 어떤 레벨 정도는 되어야 참된 사회인이 되는 거름이 된다, 이거죠. 그래서 폭넓은 학문을 자주 접하면서 균형잡힌 사회인이 되어달라는 그런 당부를 하고 싶어요.

 

 

“그 때부터 사회 진출했을 때의 무기를 나름대로 갈고 닦아서

첫 취업으로 대한항공 자재부를 들어갔어요, 내가.”

 

 

그럼 선배님의 사회생활은 어떠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68년도에 입학을 해서 4년 동안 다니다가 졸업을 했는데, 대학 2년차 부터는 밥벌이를 위해서 취직 공부에 들어갔어요. 특히 제 2외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영어책이나 타임지도 많이 보고, 종로에 YMCA 빌딩이라고 지금도 있나 모르겠는데. 미군들이 와서 한국 학생들하고 모이는 클럽에 가서 회화도 하고 그랬죠. 샘물 클럽Fountain Club. 그 때부터 사회 진출했을 때의 무기를 나름대로 갈고 닦아서 첫 취업으로 대한항공 자재부를 들어갔어요, 내가.

 

 

당시 대한항공이면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 해외 여행의 메리트도 있고요.

그렇지. 당시만해도 외국에서 한국 국적으로 관광비자가 없었어요. 외교관으로 나가는 거랑 출장 밖에 선택지가 없었는데, 대한항공 취업을 하게 되면은 비행기 타고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까 인기가 있었죠. 외국에서 물건 수출하고 수입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김포공항에서 통관하는 것부터 시작을 했어요.

 

 

어떤 업무를 담당하셨었나요?

외국에서 물건이 들어오면 통관 절차도 밟고, 세금 내고 하는 것도 있고. 또 서소문 빌딩 와서 무역 업무도 하고, 은행 다니면서 신용장 개설하고 수입 허가도 받고, 발주도 나가고. 그러다보니 미국 현지에 가서 정식으로 미국 사람 만나서 물건을 사라! 라고 해서, 제가 77년도 10월 27일에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요.

 

 

첫 비행기라니. 설레셨을 것 같아요.

특히 의미가 깊지. 그 때만 해도 마인어과 졸업 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돈이 없어서 제주 여행을 못갔어요. 그 돈이 적은 돈이 아니거든. 그래서 내 인생 첫 비행기로 LA까지 아주 장거리를 뛰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77년도 10월부터 근무를 해가지고 81년도 4월달에 귀국을 했어요. 미국에서는 대한항공에서 쓰는 모든 기계 장비나 항공 부품을 상담해서 발주하고, 가격도 깎고 그랬지. 무역업무. 그 업무를 하고나니까 귀국해서는 자재부서 과장으로 승진했고. 그러다보니 이제 사업을 하고 싶더라고.

 

 

“근데  돈이 없는데 내 회사 일을 하겠느냐.

그랬더니 아유, 부장님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해서 그렇게 시작을 한 거예요.”

 

 

한길통상의 시작이 그 때 부터였겠네요.

아주 시작을 마음 먹은 건 아니고. 사실 무역에 관심도 많았고, 또 재미있어요. 미국에 대한항공 자재 수출입을 하다보니까 서울에서 큰 장비를 살 때는 나한테 막 전화가 오고 그래. 근데 미팅을 해보면 다 나보다 시원찮아. 영어 실력도 그렇고. 그러다 보니 내가 직접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이제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지.

 

 

그러면 정식으로 한길통상의 역사를 시작하신 건 언제인가요?

어디보자… 82년도에 화곡동에 내 집에서 첫 시작은 했지만, 정식으로 사무실다운 사무실을 갖고 한 거는 83년도 10월이에요. 그러니까 34년 지났네.

처음에는 다른 회사에서 내가 데리고 있던 대리한테, 내가 사무실을 냈는데 책상 하나만 얻어 가지고 있다. 근데 돈이 없는데 내 회사 일을 하겠느냐. 그랬더니 아유, 부장님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해서 그렇게 시작을 한 거예요. 그렇게 맨땅에서 노력하다보니 일 년 만에 사업이 되더라고. 그래서 이제 여의도에 사무실을 얻었지. 84년도 여의도 맨하탄 호텔인데 지금은 이제 캔싱턴 호텔이라고 하지? 거기 위에 1306호실이 오피스텔이에요. 거기서 여직원 한사람 남직원 한 사람을 데리고 시작을 했어요. 오파상이라고 하지. 납품을 하고 수출도 하고. 신발 수출? 그런 거로 시작을 했지.

 

 

제가 아는 한길통상은 신발보다는 가정용품으로 유명한 회사인데, 신기하네요.

내 주력 아이템인 가정용품을 수입한 것은 86년도 롯데 백화점에 입점 시킨 게 그 시작이에요. 내가 미국 생활을 했으니까 회사에 접근하는 방법도 알고, 상담하는 능력도 있잖아. 그래서 라인은 잡았죠. 그 라인이 한국에서 많이 팔렸기 때문에 롯데에서 또 와라, 해서 롯데 명동에 입점이 된 거예요.

 

 

가정용품으로 범위를 넓히시면서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그렇지. 또 내가 돈이 없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업을 크게 키울 수가 없었죠. 친구한테 돈을 꿔서 수입을 하고. 또 물건 팔아서 갚고. 그런 식으로 내가 일년 동안 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창고도 없어서 우리 처가댁이 저기 역삼동에 엘지 타워 뒤쪽에 있었는데, 그 지하에 있는 주차장을 창고로 쓰기까지 했어요.

 

 

그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보자… 좋은 거 먼저 말하면… 88년도에 사업이 좀 되길래 내가 풍납동으로 이사를 와서, 아파트 한 채를 다 담보로 해서 그걸로 수입을 했어요. 사실 그게 안 되면 회사가 영 안될 뻔 했는데, 사전에 조사를 해보니까 그 아이템이 인기가 있어서 장사가 잘 될 것 같더라고. 그렇게 배팅을 했는데, 상품을 들여오고 나니 계속 나가. 특히 88년도가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기 때문에 올림픽 특수로 백화점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롯데백화점 다른 지점에도 들어가고, 현대 백화점에도 들어가고. 그래서 사세가 확장이 됐지.

 

 

“나를 도와줬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신뢰나 배려.

그런 것이 있으면은 어려운 역경도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죠.”

 

 

기억에 남는 힘들었던 일도 있으셨겠어요.

1997년도 7월에 한국에 외환위기 왔을 때, 우리가 얘기하는 IMF. 그 때 나는 수입을 하고, 수입 대금을 달러나 유럽 돈으로 바꿔 줘야 했기 때문에 힘들 뻔 했어요. 한국 원화 가치가 워낙 폭락했으니까. 그래서 그 때 수입하는 회사들이 거의 다 망했어요.

 

 

하지만 한길통상은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있네요. 

그게 내가 이틀을 전화통을 붙잡고 해결을 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이메일이나 팩스가 없을 때니까. 전화통에만 매달려서 한 삼십건 해결을 했어요. 어떻게 해결을 했느냐, 하니까. 무역할 때 선적 서류라고 해서, 신용장하고 송장이나 기타 등등을 은행에 제출하면 은행이 수입자한테 돈을 주는 시스템이야. 이 때 그걸 제출하면 한국은행으로 통과가 되서 돈을 갚아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높은 환차손을 보고 결제를 하게 되면 당연히 엄청난 손해를 입으니까, 환율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서 조금 늦게 선적 서류를 은행에 제출하게 해달라. 그렇게 했더니 그걸 거의 다 들어줬어요.

 

 

와, 좋은 분들이네요.

그리고 가격도 좀 깎아 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들어줬어요. 왜냐하면 한국 쪽에서는 지금 두 배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신도 좋은 값이면 좋겠지만 사정을 봐서 가격을 한 15프로만 깎아달라. 했더니 다 받아주더라고. 그렇게 하면서 몇 개월이 지나니까 그렇게 높았던 환율이 좀 내려가는거야. 그래서 환율도 좀 안정이 되고, 디씨도 받고, 내가 좀 손해도 봐가면서 거의 수습이 됐어요.

거기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재고는 환율이 올라서 가치가 다 뛰었으니까. 수입은 다 스탑시키고 재고를 그 기간에 많이 팔았죠.

 

 

위기를 기회로 바꾸셨군요. 

그래서 이제 이 모든 과정을 겪고 나니까… 참 역경이 닥쳐도 역경을 뚫을 수 있는 자기의 경험이나 나를 도와줬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신뢰나 배려. 그런 것이 있으면은 어려운 역경도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죠.

외국에 있는 사람들이 안 도와줬으면 지금 여러분들하고 만나서 얘기를 같이 못했겠죠? 그만큼 소중한 경험을 했어요 그때. 덕분에 직원 둘으로 시작했던 우리 회사가 지금은 직원이 한 160명 정도 되고, 사옥도 하나 가지고 있고. 백화점이랑 아울렛 합쳐서 174개정도에 입점을 해 있고.

 

 

“한길이라는 것이 좋죠?”

 

 

한길통상의 성공신화를 이렇게 자세히 듣게 되다니. 오늘 운이 좋네요. 

마지막으로 가장 여쭤보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한길 장학금과 한길 통상의 ‘한길’은 무슨 의미가 담겨있나요?

더러 우리 회사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봐요. 한길이 무슨 뜻이냐, 하고. Hanway Trading. ‘한’이 영어가 아니에요. ‘한’이라는건 ‘하나’라는 뜻도 있고. 순수 한글로는 ‘큰, 넓은’이라는 뜻도 있고. 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보면 사랑방 손님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새벽에 오죠? ‘한’ 밤 중. A deep night, very early morning. 새벽 두세시의 깊은 밤 중. 또… 선물을 ‘한’아름 사왔다 할 때 한아름은 가슴 가득히, 라는 뜻이고. ‘한’가위는 달인데, 꽉 찬 달을 의미를 의미하죠.

그래서 한길이라고 하면, 크게 키워서 가슴 가득히 풍요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하는 것. 또 보름달이 찼다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성공에서 얻은 재화나 경험, 지혜로움을 사회에 나눠 주는 것. 특히 지역 사회나 나라, 회사, 직원, 모든 이해 관계자들, 물건 사주시는 고객까지. 이 풍요로움을 같이 쉐어링하겠다는 뜻이 한길통상의 사명 속에 담겨져있어요.

한길이라는 것이 좋죠?

 

 


 

이번 인터뷰에서 <마인드>가 독점 공개하는 이영우 동문의 나날들.

손수 내어주신 사진을 소중히 이 곳에 담는다.

 

 

 


 

 

한길 장학금을 시작하신 이영우 동문님께, <시작>이란 무엇인가요?

 

<Commencement>다. 근데 이 영단어가 신기한게, 시작이라는 뜻도 되고 졸업이라는 말도 돼요. 즉 좋은 시작은 좋은 끝냄을 내포하고 있는거야. 바로 한 마디 속에 좋은 계획, 좋은 시작을 가지고 있으면 끝남도 반 정도는 좋게 끝난다. 열심히 좋은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뛰면, 백 퍼센트 좋은 끝남으로 마무리 될 수가 있는 거고. 그렇습니다.